로봇이 된 감정 노동자들 “우리는 가면을 쓴 채 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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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된 감정 노동자들 “우리는 가면을 쓴 채 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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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쓴 채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 중 누가 아파도 웃어야 하고 신나는 일이 있어도 웃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끊고 로봇이 된 사람들, 우리는 이들을 감정노동자라 부른다. 많은 감정노동자의 속은 곪을 대로 곪아 있지만 이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는 여전히 부족하다. 어떻게 하면 이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죽고 어요” 남모르는 고통에 아우성

서울시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가 설문조사 등으로 수집한 사례를 보면 감정노동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엿볼 수 있다.

서울의 한 주민센터에서 복지플래너로 일하는 30대 여성 A씨는 일을 시작한 지 2~3일 만에 끔찍한 경험을 겪었다. 한 주민이 다짜고짜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위협했다. 그 주민은 분이 안 풀렸는지 이후 임신한 A씨에게 전화를 걸어 ‘니 배 안에 있는 아기를 죽이겠다’고 했다. A씨는 일을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금융업체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들은 ‘돈’을 다뤄서인지 종종 심각한 상황에 놓인다. 폭언은 예사고 감금돼 폭행당하거나 성폭력에 노출되는 일도 잦다. 콜센터 상담원 B씨는 다짜고짜 반말하고 이름부터 따져 묻는 고객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

“‘안 들려? 너 이름이 뭐냐, 됐어. 다른 사람 바꿔’라거나 ‘너 귀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병원부터 가봐’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니가 도와주긴 뭘 도와줘?’라면서 무시하는 고객들도 있죠.”

여성 보험설계사에게 성희롱은 피할 수 없는 굴레다. 보험을 들어 줄테니 잠자리를 함께하자고 요구하는 남성도 있다. 보험설계사 C씨는 “인식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놀러 와라, 자고 가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얘기하는 고객들이 있다”면서 “처음부터 일정하게 선을 그어도 계속 그러기에 ‘100만원 계약해주면 갈게’라고 했더니 그 뒤로는 연락이 없었다”고 호소했다.

동주민센터 방문간호사인 D씨는 70세가 넘은 할아버지를 찾아갔을 때 성희롱을 당했다.

“혈압을 재는데 느낌이 이상하더라고요. 얼른 나오려고 하니 할아버지가 손을 잡으면서 왜 이렇게 빨리 가냐고 하더라고요. 나가려고 보니까 문고리가 채워져 있었어요. 이 일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했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례도 있다. ‘욕받이 부서’로 통하는 통신사 해지방어 부서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여고생 E양은 2017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그에게 해지방어 업무는 가혹했다. 고객들의 욕설과 항의, 실적 압박의 스트레스가 E양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E양은 숨지기 전 “아빠, 나 콜 수 못 채웠어”라며 자책했다고 한다.

감정노동자 800만명, 대다수가 고통

감정노동은 주로 고객 응대 업무에서 발생한다. 유통과 금융, 안내, 돌봄, 외식, 병원, 공공부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8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체 임금 노동자의 40%나 된다. 서울의 경우 그 규모는 더 커서 전체 취업자의 절반 정도인 260여만명이 감정노동자로 분류된다.

감정노동은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 고려대의대 한창수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감정노동을 경험한 여성 노동자는 그렇지 않은 여성 노동자에 비해 우울증 위험이 2.19배나 높다.

2017년 보건의료산업 연구에 따르면 1525명의 보건의료산업 종사자 중 67.9%가 감정노동으로 신체적·정신적 침해를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 중 95.4%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즉 감정노동자 중 3분의 2 이상이 고통을 경험했고 그중 대다수가 그냥 참고 견딘 셈이다.

감정노동자의 고통의 원인은 주로 과도하게 친절을 상품화한 기업에 있다. ‘고객은 왕’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엇이든 해결해드립니다’는 식의 고객 응대가 ‘백화점에서 30분 화내면 상품권이 나온다’고 믿는 갑질 진상 고객들을 키운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친절은 정말 일반 고객들을 만족시켰을까. 꼭 그렇지는 않다. 소비자들은 친절보다 적절한 서비스를 제때 제공하는 것을 가장 원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이성종 감정노동전국네트워트 집행위원장은 19일 “우리가 자체 조사한 설문 결과를 보면 일반 소비자들의 70% 정도는 오히려 과도한 친절을 불편해 했다”면서 “소비자 불만은 주로 기업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거나 제때 응대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고 밝혔다.

“고객이 왕? 노동자가 왕!” 생각을 바꾸자

그는 미국 동부의 마트 체인 ‘웨그먼스’를 예로 들었다. 여론조사기관 해리스폴이 지난 3월 발표한 ‘2019 기업평판 우수 100대 기업’에 당당히 1위에 오른 웨그먼스는 ‘직원이 먼저, 고객은 다음(Employees First, Customers Second)’이라는 기치 아래 직원 보기를 금같이 하는 곳이다. 기업은 직원을 최고로 대우하니 직원은 고객을 최고로 대접하고 그 결과 높은 생산성과 매출의 선순환이 이뤄진다. 이 집행위원장은 “웨그먼스 사례를 보면 직원의 행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면서 “친절은 강요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직원이 행복해야 나온다는 점을 기업들도 이제는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악성 민원인에 대한 법적 대응을 강화하는 것도 방법이다. 다산콜센터의 경우 악성 민원인을 꾸준히 고소·고발했더니 하루 31건에 이르던 악성 민원이 2, 3건으로 줄었다.

감정노동으로 인한 고통은 이들을 고용한 기업에서 다루는 게 좋다. 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심리상담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10월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감정노동종사자 권리보호센터를 열었다. 센터는 2017년 시범사업부터 지금까지 581명을 상대로 3545회의 상담 서비스를 제공했다. 센터에서는 전문가 2명이 상주하면서 심리상담을 해주고 노무사 등을 통해 노동법률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감정노동자는 미술치유나 음악치유, 명상 등 20가지 테마치유 프로그램 중 원하는 것을 골라 1주일에 2시간씩 총 4회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센터가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는 무료다. 학원 유학생 상담일을 하다 중증 우울증을 호소했던 50대 여성은 센터 심리상담을 통해 도예치유 프로그램을 받았다가 아예 도자기 강사로 변신했다. 지역별로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제공하는 심리상담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이정훈 센터 소장은 “이제 고객이 왕이라는 생각 대신 노동자가 왕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면서 “센터는 감정노동 종사자들이 행복해지고 이로 인해 사용자와 소비자까지 모두 윈-윈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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