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듯 폭발적… 90년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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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듯 폭발적… 90년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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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는 1990년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였다. 80년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가 안성기였듯이. 9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사를 유의미하게 수놓았던 일련의 수 걸작들 덕택이었다. 첫 주연 영화 ‘닥터 봉’(감독 이광훈 1995)을 필두로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1996), 이창동의 ‘초록 물고기’(1997), 송능한의 ‘넘버 3’(1997), 장윤현의 ‘접속’(1997),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다시 강제규의 ‘쉬리’(1999) 등이 그 주인공들. ‘쉬리’ 말고는 한결같이 각 감독의 주목할 만한 데뷔작들이자,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결정적 성취를 일궈낸 문제작들이었다. 그 성취의 일등공신이 한석규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한석규의 발견, ‘닥터 봉’

‘닥터 봉’은 가히 ‘한석규의 발견’이었다. 그 사례가 흔치 않은 수준급 코믹 로맨스 영화였다. ‘결혼 이야기’(김의석 1992)와 더불어 90년대 최고 코미디 영화이기도 하다. 한석규의 능청맞은 실감 연기는 지금도 여전히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된 바, 향후 전개될 ‘한석규 시대’를 예고하기에 모자람 없었다. 한석규는 영화 이전에 TV 탤런트로서 그 존재감을 입증했다. 근래에도 ‘뿌리깊은 나무’(2011)에서의 이도 세종대왕 역과 ‘낭만닥터 김사부’(2016·이상 SBS)에서의 김사부 역 등으로 건재함을 뽐냈다.

한석규는 90년 KBS 성우로 입사했다가, 91년 MBC 탤런트 공채 제20기로 재입사했다. 크고 작은 조 단역을 거친 뒤 94년, 최민식 채시라 등과 함께 주연을 꿰찬 주말 연속극 ‘서울의 달’에서 야망 찬 제비족 김홍식 역으로 스타덤에 등극했다. 채시라가 그해 대상을 차지한 MBC 연기대상에서 남자 최우수상을 거머쥐었다. 서울 달동네를 배경으로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실감 가득 그리면서 48.7%라는 최고 시청률과 평균 40%대 시청률로 방영 내내 1위를 기록한 그 드라마에서 한석규는 압도적이었다. 이후 주 무대를 스크린으로 옮겨 충무로에서도 흥행 배우로 거듭나는데, 그 신호탄이 ‘닥터 봉’이었다.

영화 데뷔작으로 통쾌한 안타를 쳤으니, 영화배우로서 한석규의 탄탄대로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보란 듯 날려버리고, ‘은행나무침대’에서 연속 안타를 친다. 고 장국영, 왕조현 주연의 걸작 ‘천녀유혼’(정소동 1987)의 한국판으로 손색없는, SF적 국산 역사 판타지 멜로드라마였다.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김기덕의 ‘악어’와 나란히 96년을 한국영화 100년사의 기념비적인 해로 비상시킨 이 영화에서 한석규는, 전작에서의 외연과 내포에 버금가는 크고 그윽한 연기의 맛을 선사한다. 석판화가이자 대학 강사인 오늘날의 수현과, 공주 미단(진혜경)과 이뤄지지 않는, 그래서 은행나무침대를 매개 삼아 현대로 이어지는 사랑을 하는, 1000년 전 궁중 가야금 악사 종문 1인 2역으로. 당시 종문-미단의 사랑을 질투해 종문의 목을 베는 황장군 신현준과 한석규 사이의 연기 대결은 영화의 화제성을 배가시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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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물고기’부터 ‘쉬리’까지, 위 두 수작 이후 한석규의 대로는 더 할 나위 없이 탄탄해진다. 그 면면이 눈부시다 못해 숨이 가빠진다. 그 집중성에서는 비교의 대상을 찾기 쉽지 않다. 그러니 어찌 90년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라 칭하지 않겠는가. ‘버닝’(2018)에 이르기까지 빚어내는 영화마다 어떤 경지를 일궈낸 이창동의 출발점인 ‘초록 물고기’의 한석규와 그가 체현한 막동은 한국영화 100년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목록에서 수위를 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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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기생충’(2019)처럼 더 희·비극적일 수 없을 비운의 휴먼 드라마에서 한석규는 한 배우가 구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연기를 선보인다. 심심한 듯하면서도 강력하고, 느슨하면서도 꽉 찼으며, 잔잔하면서도 폭발적인…. 다채로울 대로 다채롭고 입체적일 대로 입체적인 연기 스펙트럼을 전시한다고 할까. 특히 막동이 김양길(명계남)을 살해한 후 전화로 ‘큰 성’(최호성)에게 독백하는 시퀀스는 한국영화사의 명장면 중 명장면으로 간주되는데, 당연지사다. 그뿐만 아니다. 훗날 한국영화 연기의 역사를 다시 써나갈 송강호가 실제 깡패보다 더 깡패 같을 사실적 연기를 뽐내나, 개봉 당시 별다른 눈길을 끌지 못한 것도 한석규에게 가려졌기 때문 아니겠는가. 한석규는 대종상,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에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자연기상 등을 휩쓸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자 미래형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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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 송강호, 최민식 3인방이 처음으로 협연한 ‘넘버 3’는 어떤가. ‘넘버 3’ 깡패 자리를 놓고 사활을 거는 코믹 범죄 액션물. 역시 한석규다. 그리고 ‘넘버 3’와 ‘쉬리’ 사이에 더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한국 멜로 영화사의 두 금자탑 ‘접속’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그가 있다. 기념비적 멜로 캐릭터들인 동현과 정원의 현현인 한석규가. 그야말로 명불허전의 연기요,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넘버 3’에는 전례 없는 코믹 연기로 한석규의 영화를 자기 것으로 둔갑시킨 조연 송강호(조필 역)나, 깡패보다 더 깡패 같은 검사 마동팔 역의 최민식이 한석규 못잖다. 삼파전을 음미하는 재미가 여간 쏠쏠치 않다. 그 기세가 한석규에서 송강호와 최민식으로 기울어질 듯한 조짐도 없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넘버 3’에 이어 세 명의 배우들이 다시 뭉쳐 자웅을 겨룬 ‘쉬리’에서 그 기세는 최민식 압승, 한석규 참패, 송강호 중간승 패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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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산업의 향방을 근본적으로 전환한 대표적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 한석규는 적잖이 흔들린다. 연기를 못해서는 아니었다. 캐릭터의 균열 탓이었다. 국가 비밀정보기관의 최정예 특수 요원이라는 설정에 무색하게, 그가 맡은 유중원은 영화 내내 그 설정에 부응하지 않는 것. ‘쉬리’를 졸작이라고 혹평한 것은 무엇보다 그 때문이었다. 그 흔들림은 ‘텔 미 썸딩’과 ‘이중간첩’ 등으로 이어진다.

위키피디아의 다음과 같은 진단은 무리가 아니다. “데뷔작인 ‘닥터 봉’부터 ‘쉬리’까지의 연속적인 흥행 성공으로 9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 영화계의 부흥기를 이끌었지만 99년 ‘텔 미 썸딩’이후 긴 휴식기에 들어간다. 3년간의 공백을 깨고 고소영과 출연한 ‘이중간첩’의 흥행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흥행 배우로서의 경력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으며 2006년 이범수 김민정과 공연한 ‘음란서생’을 제외한 다른 영화들이 매우 저조한 흥행 실적을 기록하였다.”

위 진단은 물론 수정돼야 한다. 흥행만의 문제는 아닌 탓이다. 더욱이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2013)처럼 700만을 넘긴 ‘대박’도 있고, ‘프리즌’(2016)처럼 300만에 근접한 ‘중박’도 있다. 비평적으로도 크고 작은 수작이 없지 않다. 한석규의 연기에 초점을 맞추면, 그의 섬세하면서도 꾸준한 연기 변신에 갈채를 보내야 마땅하다. ‘프리즌’의 악역도 그렇거니와, 상대역 김혜수가 유난히 각별한 애정을 피력한 ‘이층의 악당’(손재곤 2010)의 정체불명 사이비 작가,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박신우 2009)의 엉뚱 열혈 형사, 한석규가 “한국영화의 새로운 대안”이라며 극찬했던 코믹 잔혹극 ‘구타유발자들’(원신연 2006)의 문제적 캐릭터 문재 등이다.

‘음란서생’은 어떤가. 전성기와 같은 발군의 연기를 과시한 화려한 재기작! 일찍이 평했듯 강약을 겸비한 섬세한 연기는 ‘이중간첩’ 등에서 드러낸 바 있는, 다분히 단선적이고 경직된 연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전에 없이 여유로우며, 덕분에 보기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그 연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2시간20분에 달하는 짧지 않은 시간이 훌쩍 흘러간다. 아울러 연기의 입체성 덕에 마지막 순간까지 극적 호기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빈말이 아니라, 그 연기는 원숙한 차원의 그 무엇이다. ‘연기의 재탄생’이랄까.

한석규 그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자, 미래의 배우로 기록될 자격이 넉넉하다. 90년대 중후반의 위용에 다소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긴 해도…. 최민식(장영식 역)과 오랜만에 호흡을 맞춘 ‘천문: 하늘에 묻는다’(허진호)의 개봉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이번에는 어떤 세종을 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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