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고생이 할매들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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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고생이 할매들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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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다.”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인데 잘 와닿지 않는다. 그런데 “그라니 시집 와가 아 일찍 논 여자들은 시오마이 아 받아주고 젖도 먹여 키우고 그케 마이 했다”라는 문장을 읽노라면 집집마다 아이가 얼마나 많이 태어났는지 느낌이 팍 온다.

대구 달성의 산골 마을인 우록리 할머니 6명의 생애 구술이 담긴 신간 ‘할매의 탄생’에 나오는 얘기다. 저자는 도시 빈곤 노인의 생애를 구술한 ‘할배의 탄생’으로 잘 알려진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62)이다. 구술생애사란 구술을 통해 개인의 생애를 기록하는 일을 가리킨다. 지배층 중심의 기존 역사가 배제한 민중의 목소리라는 점에서 사료 가치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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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은 1928년부터 55년 사이에 태어났다. 작가는 2017년 여러 차례 이 마을로 내려가 할머니들의 생애를 녹취했고, 구술을 최대한 살려 정리했다. 할머니들의 생애 경험과 해석, 보람과 상처가 생생한 경상도 사투리로 나온다. 우리 사회가 압축적 근대화를 거치는 동안 농촌의 이 할머니들이 어떻게 살고 관계를 맺었는지를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다.

첫 번째 주인공은 조순이(82·대촌댁) 할머니다. 소제목이기도 한 “내 살은 거를 우예 다 말로 합니꺼”란 말이 조 할머니의 생애를 단적으로 짐작케 한다. 열한 살이 되던 해, 체증에 걸린 어머니가 저세상으로 갔다. 네 살, 다섯 살 동생을 키우며 살림을 도맡아 했다. 우록리로 시집을 와보니 시어머니와 시형제 일곱이 밥상 앞에 둘러앉았더란다.

없는 살림에 손만 큰 시어머니와 다투다 첫아이를 낳고 친정으로 ‘내뺐다가’ 젖이 불어서 우록리로 돌아왔다. “아 놓고 일주일 만에 모 숭구러 가는 거럴 안 말긴 거도 글코, 마 빚내서 남 퍼주는 거도 글치만도 젤 서러분 기 한동네 바로 저 있는 시동상네 사논 집으로 나가뿌신 거, 거거가 내는 제일로 그캅디다. ‘몬된 맏미누리가 시오마이 쪼까냈다’ 방 붙이는 거라예.”

하지만 지금은 자손들이 잘 되는 이유가 시어머니가 생전에 많이 베푼 덕이라고 여긴다. “어른이 빌게(별게) 아이고, 죽고 나서 자식들한테 갈챠줄 기 있는 기, 그기 어른입디다. 우리 시오마이는 어른이지예. 뒤늦게라도 내가 배우는 게 있으니까네.” 그는 시어머니를 이렇게 말할 만큼 이미 너그러운 어른이다. 여전히 상처받는 말은 있다. “오매는 했는 기 뭐 있노?”라는 장남의 원망이다.

“그래 없어가지고 대학 몬 시긴 걸로 하는 말인지, 공부가 아숩던 모양이라. 그래도 ‘했는 기 뭐 있노’ 이카이 으찌나 섧은지….” 할머니는 아들의 버스비를 마련하기 위해 밭을 맸다. “밭매만 그때 돈으로 삼천원인가 그런데, 차비 줄라꼬 혼자 넘의 밭 기어다니매 밭매고, 허리 아파가 밤에 잘 자도 몬하고.” 아들이 어머니의 이 고생을 알 리 없다. 부모의 내리사랑인 모양이다.

경북 청도에서 이 마을로 시집온 이태경(84·각골댁) 할머니는 아직도 홍역으로 일찍 잃은 여섯 살 난 딸 얘기를 하면 눈시울을 붉힌다. 계모 밑에서 자란 유옥란(77·안동댁) 할머니는 첫 남편과 사별 후 우록리 남자와 재혼을 했다. 그에게 딸이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손녀를 서울로 보내버렸다. “지도 새오매 밑에, 계모 밑에 자랐으믄서 전처 아를 쪼까냈다 카마 별 억지가 많더라. …이제는 넘들 말질은 마 아무치도 않다. 갸가 젤 불쌍코, 어려서 오매 죽어뿐 내가 불쌍타. 우야겠노….” 우록리 태생의 김효실(65) 할머니는 빨치산에게 총을 맞아 불구가 된 아버지와 아픈 어머니 때문에 우록을 떠나지 못했다. 우록 마을의 ‘큰형님’ 곽판이(91·창녕댁) 할머니는 남편의 제사는 챙기면서도 “나 죽으면 화장해라. 제사도 지내지 말라”며 죽음에 대범하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임혜순(77·수점댁) 할머니는 “살아온 게 다 한심하고 속에서 불떡증이 난다”고 한다.

그럼에도 할머니들은 올해도 “콩 쪼매 숭구고, 들깨 쪼매 숭구고, 상추, 배치도 좀 숭구”며 살아간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노동과 통증, 가부장의 균열, 다양한 낙인 등 우리 사회를 새겨볼 만한 단상을 정리한다. 최 작가는 14일 국민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보수적인 농촌에서 산 여성 노인들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도시 빈곤 노인과 달리 땅이라는 터전이 있는 이들이 가족과 공동체에서 상대적으로 덜 유리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주인공들이 얼마나 고생했고 가난했는지가 아니라 그 가난과 고생으로 그들 안에 어떤 힘의 깡치가 생겼는지, 그것이 그들을 얼마나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었으며 그 힘으로 어떻게 자기 삶과 세상을 버텨왔는가를 밝히는 것이 이들의 생애를 세세히 묻는 이유다.” 이 말처럼 책은 가난과 고생이 할머니들의 생을 얼마나 애처롭게 했는지 주목하기보다는 할머니들을 얼마나 강인하게 만들었는지를 실감 나게 전한다. 어쨌든 할머니들은 이 생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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