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전정희] “누가 역적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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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소금-전정희] “누가 역적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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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고리와 모직 치마는 주인 색시 예배당 입고 가라고 그냥 두지.” “차압 집행 맞은 집 메누리가 잘 입고 회당 가서 무얼하겠습네까. 어서 한 가지라도 돈 되게 하시라요.”

1920년 초 평남 강서군 독립운동가 김예진 목사(당시 전도사) 집에 집달리들이 들이닥쳐 여기저기 차압 딱지를 붙였다. 김예진 한도신 부부는 당시 부모 김두연 부부를 모시고 살았는데 김두연은 정미소를 하는 지역 유지였다. 그런데 김예진이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면서 독립운동을 벌였고 1919년 3·1운동 때 체포되어 징역살이했다. 김예진은 그해 10월 병보석으로 평양 기독병원 입원 후 선교사들 도움으로 김구 선생이 있는 상해로 탈출한다.

몇 달 뒤 김예진은 아버지 김두연에게 긴히 네 사람을 보냈다. 상해 임시정부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궐기하라는 격문을 전했고, 한도신은 이를 집집이 돌며 몰래 뿌렸다.

하지만 임시정부 청년들이 돌아가고 일주일 후쯤 헌병 40~50명이 이 집을 둘러쌌고 가택수색을 했다. 장롱에서는 독립자금 뭉칫돈, 파묻은 항아리에선 서류와 인장, 쌀겨 섬 속에선 보자기에 싸인 등사판이 나왔다. 정미소는 폐쇄됐고 가족과 일꾼까지 모두 잡혀갔다. 다행히 김두연이 없을 때였다.

일경은 사흘 동안 그들을 취조했다. “시어머니와 함께 힘줄 같은 여러 오래기를 합해 뱅뱅 꼬아서 말린 소좆몽둥이 채찍으로 사흘 밤낮을 맞았다”고 한도신이 증언했다. “채찍에 맞으면 살에 폭폭 박히더라”고 했다.

이들 가족이 진짜 고통스러웠던 건 그다음이다. 독립운동하다 집안이 망하게 됐다는 소문이 퍼졌고 정미소와 거래하던 이들이 거래 대금을 못 받을까 봐 강제 집행에 나섰다. 김두연과 호형호제하던 친구가 가장 돌변했다. 한도신이 시집올 때 가져온 신혼 저고리에까지 차압 딱지를 붙인 것이다. 집달리가 예배당에 입고 갈 옷이라며 새댁 형편을 들어 채권자에게 사정했으나 “만일 인지를 떼면 감옥소 가게 될 줄 아시라요”라고 새댁을 협박했다.

한도신은 가집행을 막으려고 시할머니와 함께 외상 쌀값 영수증을 들고 납품하던 금광회사 동포 주인을 찾아갔다. 금광 인부들 쌀을 대 먹었던 곳이다. 하지만 첫마디부터 거칠었다. 한도신이 “아즈바니, 다만 절반이라도 주시라요” 하고 애걸복걸했다. 한데 금광 주인이 나가서 얘기하자며 두 사람을 이끌었다. 점심 대접도 받고 돈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광산주는 그들을 주재소로 데려가 조선인 순사 앞에 세웠다. 조선인 순사가 영수증을 보자고 하더니 그것을 일본 순사에게 넘겼다. 일본 순사는 영수증을 꾸깃꾸깃 손에 쥐더니 “빠가야로” 하면서 난로 문을 열고 불태워 버렸다. 옆에서 조선 순사가 “어서 물러가지 못하갓어” 하고 고함쳤다. 한도신은 털썩 주저앉아 우는 시할머니를 부축하며 “할머니, 참우라요. 독립만 되면 다 원수 갚을 거야요” 하고 울었다.

두 사람은 며칠 후 또 다른 지역 금광 주인을 찾아갔다. 역시 동포였다. “우리 집에 왜 왔소. 당신 집안 같은 역적한테 돈을 주면 우리가 큰일 납네다”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도신은 분에 차 “누가 역적이오. 남의 나라 빼앗은 놈이 역적이디. 나라 잃고 설움 당하는 것도 원통한데 역적 소리까지 들어야 한단 말이오” 하고 따졌다. 너무 분해 그래도 혹시나 하고 주재소에 가 영수증을 내밀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일본 순사가 화덕에 넣어 버렸다. 금광 주인들이 순사들과 정보를 교환한 것이다.

한편 김예진은 이후로 수차례 투옥되며 살아남았다. 광복 후엔 서울 남산 아래 후암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새벽기도를 마치면 톱을 들고 산에 올라 남산 신궁 터 ‘사쿠라(벚나무)’를 베어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 때 인민군에 손에 순교하고 말았다.

올해가 3·1운동 백주년이다. 일본의 경제보복이 심화하고 있다. 그들로 인해 분단과 전쟁과 가난을 겪었고 이제 겨우 한반도의 반쪽 대한민국이 먹고살 형편이 됐다. 하지만 경제보복 이슈를 대하는 우리 내부 사정이 간단치 않다. 정권이 밉다고 내부 총질하는 이들이 적잖다.

우리 역사의 보수는 의병과 같은 자세였다. 사색 당론이라 하더라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땐 힘을 모았다. 쇼군이 죽으면 지리멸렬했던 일본은 장수가 죽어도 의병을 규합하는 한국을 무서워했다. 정신이 달랐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혜를 짜내고 이를 따를 때다.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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