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신창호] 한국판 앨라배마 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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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신창호] 한국판 앨라배마 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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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에게 “당신네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주가 어디냐”고 물으면 으레 “앨라배마”란 대답이 돌아온다. 악명 높은 백인우월주의 단체 쿠클럭스클란(KKK) 본부가 있던 지역, ‘목화 지방’이란 별명을 가질 정도로 흑인 노예의 노동력 착취에만 취해 있던 곳, 아직도 흑백 차별의 흔적이 쉽게 목도되는 곳, 부자보다 빈자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는 주…. 1990년대 중반 이전까지의 앨라배마 대명사는 한둘이 아니었다.

이 덥고 습한 시골이 지금은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로 가득 찬 지방이 됐다. 우리 기업 현대차가 주도 몽고메리에, 독일 메르세데스-벤츠, 일본 도요타와 혼다가 앨라배마에 대규모 자동차 공장을 지었다. LG전자의 미국 내 생산 기지도 이곳에 있다. 자동차를 팔려면 수요가 많은 대도시와 가까운 지역에 공장을 짓는 게 좋았을 텐데, 글로벌 기업들은 미국 중남부의 끝이나 마찬가지인 앨라배마를 선택했다. 이유는 주정부가 내세운 획기적인 지원책들 때문이다. 인건비를 미국 평균 근로자 임금보다 낮추고, 입지조건 좋은 땅을 싸게 제공했으며, 각종 세제와 지원 혜택을 줬다. 지금 한창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들 사이에 유행하는 ‘노·사·정 상생형 일자리’의 프로토타입(prototype·원형)이었던 셈이다. 한 나라의 경제가 선진국형에 가까워지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곪아 터지기 마련이다. 먹고살기 빠듯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배가 좀 부르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모순’으로 둔갑한다. 외형적 성장보다는 정의로운 분배가, 무조건 발전하고 보자는 생각이 서로 균형 있게 발전하자는 시각으로 바뀌게 된다. 그동안의 한국 경제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만의 기형적 성장이란 특징으로 채워졌다. 인구도 전체의 3분의 1이 서울·경기지역에 몰리고, 공장도 기업도 행정기관도 문화시설도 여기에만 편중됐다. 부산 대구 광주 울산 같은 지방 대도시를 제외하면 수도권과 같은 궤도의 성장엔진을 가진 곳이 드물었다.

우리 경제는 이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균등 발전 모델을 버티기 힘든 지경에 도달했다. 기업들은 인건비와 입지조건 같은 경쟁력 요소가 불리하면 굳이 국내를 고집하지 않는다. 대규모 생산 시설을 인건비가 싼 중국과 베트남으로 옮기는 대기업이 속출하는 이유다. 이제 이런 한국 기업들의 눈을 외국이 아니라 지방으로 돌리게 할 때가 됐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시골 오지의 땅을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서 개발해 외국보다 좋은 조건에 제공하면 될 일이다. 노동계도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 발전은 정책 슬로건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중앙정부가 행정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해서 달성되는 것도 아니다. 한 사회의 문화적·정치적 상부구조는 경제라는 튼튼한 하부구조가 존재할 경우에만 발전할 수 있다. 질 좋은 일자리가 많아져 이 일자리에 고용되는 사람이 많아져야 비로소 지역 전체가 발전한다는 뜻이다. 조만간 실행 단계에 돌입하는 ‘광주형’ ‘구미형’ 일자리는 한국판 ‘앨라배마 키우기’ 실험과 다름없다. 두 지역의 대규모 일자리 창출 사업이 성공하면 다른 광역 지자체들도 속속 특성에 맞는 일자리 사업에 뛰어들 것이다. 아니 벌써 울산과 강원도, 전남 같은 광역 지자체들의 일자리 사업 아이디어는 쏟아져 나오고 있다.

관건은 정부와 기업, 노동계가 어떻게 적절한 균형을 찾느냐다. 서로 자기네 몫만 챙길 생각을 하지 않고, ‘내 파이’를 떼어내 ‘남의 입’에도 넣어줄 수 있는 용기를 갖느냐다. 당장 눈앞의 이익으로만 보면 지역형 일자리는 기업 입장에서도, 노동계 입장에서도 손해다. 지방정부도 아까운 땅을 헐값에 넘기고, 세금도 깎아줘야 하니 손해일 뿐이다. 그러나 좀 더 눈을 크게 뜨면 노·사·정 모두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는 대사(大事)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동네 실업자가 사라지고, 우리 동네 신도시가 생겨나고, 우리 동네 글로벌 기업이 생기는 일이니까 말이다.

신창호 사회2부장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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