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종묵] 물은 바위를 만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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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이종묵] 물은 바위를 만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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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태백의 구무소라는 곳에 다녀왔다. 낙동강이 발원하는 곳으로 알려진 황지에서 솟아난 황지천이 굽이굽이 돌며 남으로 달리다 거대한 바위를 만난다. 갈 곳이 없는 물이 바위에 부딪히고 또 부딪혀 구멍을 뚫었고 지금은 이렇게 생긴 큰 굴로 황지천이 힘차게 흘러내린다. 구멍이 나 있는 소라 하여 구무소 혹은 구문소라 하며 한자로는 공연(孔淵), 천천(穿川)이라 적는다. 구무소는 이렇게 하여 생긴 명승이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그 풍경의 아름다움과 함께 자연의 위대함에 놀라게 된다. 조선 후기의 큰 학자요 천주교를 신봉하다 옥사한 이가환(李家煥)이 벼루에 새긴 글 “굳다고 말하지 말라, 갈면 뚫리나니, 학문에 뜻을 두라, 어찌 그리하지 않는가(勿謂堅 磨則穿 志於學 奚不然)”와 함께 의지를 다질 만한 곳이다.

그런데 순조 연간의 학자 이병원(李秉遠)이 벗의 정자 석탄정(石灘亭)에 붙인 글을 읽으면 좀 다른 공부를 할 수도 있다. 이병원은 바위가 옥보다 광택이 없어 아름다운 보배로 만들 수 없고 흙보다 무르지 않아 식물을 심거나 그릇을 만들 수 없으며 나무보다 부드럽지 못하여 그릇을 만들 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바위가 천하에 무용한 것이라 여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런 멋진 말을 붙였다.

“빼어난 명산에 올라 즐기는 곳에 바위가 있으면 기이하고 바위가 없으면 범범한 법. 은사나 문인이 숨어 살면서 차지하고 있는 땅에 바위가 있으면 이름나고 바위가 없으면 삭막하여 옳은 태가 나지 않는다. 이는 무용한 곳에 숨겨져 있는 효용이라 하겠다. 그러나 바위는 저절로 기이할 수 없으니 물을 만나야 기이해진다. 물이 바위와 만나면 출렁거리고 뿜고 휘돌고 날리게 되는 것은 오직 바위에 따른 것이요, 콸콸 부딪치고 동탕하면서 넘실거리는 것은 오직 바위가 울린 것이다. 바위가 물이 없으면 멍청하고 추잡한 것에 불과하고 물이 바위가 없으면 아득히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것일 뿐이다.”

바위는 무용한 듯 보여도 물을 만나 멋진 풍경을 만든다는 점에서 쓰임이 있다고 하였다. 이병원은 ‘옥계(玉溪)’라는 시에서 “바위를 만나야 물이 기이함을 드러낸다(遇石水逞奇)”고도 하였다. 멋진 말이다. 중국이나 유럽에 가면 볼거리로 운하를 든다. 나는 운하가 사람에게 유용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멋진 볼거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운하는 물이 흐르는 둥 마는 둥, 물결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우리 땅 어디든 자연하천이라면 바위가 있어 절로 물살이 일고 포말이 튀어 멋진 풍경을 만든다. 그래서 당장 돈이 되는 ‘눈앞’의 유용함보다 ‘눈앞’의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한때 국토의 70%가 산이므로 깎아서 자갈이나 모래 등 건축자재도 얻고 평지로 만들어 농사를 짓거나 건물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닷가에 드넓게 펼쳐진 개펄을 보고 아무짝에 소용없다고 여겨 메꾸어 간척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4대강 사업이라 하여 거대한 운하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나는 우리나라에 황량한 사막이 없는 것이 불만이고, 바위에 부딪히고 굽이굽이 흐르는 개울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200년 전 이병원은 또 다른 결론을 내렸다.

“바위는 지극히 강한 존재요, 물은 지극히 약한 존재다. 강한 것과 약한 것이 서로 부딪친 다음에야 그 기예를 드러낼 수 있다. 바위는 지극히 고요한 존재요, 물은 지극히 움직이는 존재다.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서로 적신 다음에야 그 효용을 완수할 수 있다. 아마도 조물주가 서로 베풀어 드러나게 해주고 체(體)와 용(用)이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어 있는 듯하다.”

말이 다소 어렵지만 강자와 약자가 서로 어우러져야 아름다운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뜻이리라. 구무소를 보고 운하를 떠올리며 눈앞의 기이한 풍경을 즐긴 나보다, 격물(格物)의 공부를 한 옛사람의 식견이 앞선다. 구무소를 보고 얻은 마음의 공부다.

이종묵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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